유관순: 지하감옥에 이름이 남았고, 시작은 그 대문이었다
1919년 3월 1일에 열여섯이었고, 죽을 때 열여덟이었습니다. 흰 소복을 입은 학생 다섯이 망곡을 한 대한문에서, 아직 그의 이름이 붙어 있는 서대문형무소 지하 감방까지. 그리고 직접적인 사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언어

서대문형무소의 현존 건물 목록에는 「유관순 지하감옥」이 들어 있습니다. 방문자는 안내판을 읽고 지하를 들여다본 뒤, 그가 누구였고 몇 살이었는지는 대개 듣지 못한 채 나옵니다.
1902년 12월 16일에 태어나 1920년 9월 28일에 열여덟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그 사이의 모든 일이 스무 달 안에 있었습니다.
한눈에 보기
이화학당의 교비 유학생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고 1918년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올랐습니다.
시작은 대한문이었다
1919년 3월 1일 학생 다섯이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한 뒤 남대문 쪽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상고하지 않았다
복심에서 3년형을 받았고, 함께 재판받은 이들이 모두 상고할 때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아 홀로 상고하지 않았습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수형기록표 사진으로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을 뿐입니다.
시골 소녀가 서울 학교에 있게 된 경로
그 경로는 교회 하나와 길 하나를 지납니다.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할아버지 유윤기와 숙부 유중무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습니다.
고향은 철도가 부설되기 전 서울과 충청남도 공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선교사들이 개신교를 집중적으로 전파하던 곳이었고,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했고, 서명학·이정수·사촌 언니 유예도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했습니다. 1918년 3월 18일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습니다.
학교는 이미 정치적인 곳이었습니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이문회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열고 있었는데, 재학 중이던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그리고 관광객이 사진 찍는 그 문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덕수궁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노예달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직접 참여했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이던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고, 지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수문장 교대의식이 재현되는 곳입니다. 그 앞의 망곡은 승하한 황제를 향한 것이었고, 행진은 그 직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고,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운동 자체는 따로 다룹니다.
아우내, 4월 1일 — 그날의 값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했습니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습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열여섯이었고, 부모가 눈앞에서 죽었습니다.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3년형을 언도받았습니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습니다.
상고를 하지 않는 것은 법적 전술이 아닙니다. 그 법정에 자격이 없다는 선언이고, 그 대가로 형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1920년 3월 1일 — 형무소 안에서 벌인 시위
지금 방문자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담 안의 삼천 명과 담 밖에서 멈춘 전차. 지하 감방에 이름이 붙은 사건의 크기가 그것입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형기가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에 18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 여기서 기록은 조심스럽고, 이 글도 그렇게 씁니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서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시신, 장례, 그리고 잃어버린 묘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했고,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했습니다.
1920년 10월 12일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했습니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했습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습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되었습니다.
찾아갈 묘가 없습니다. 그 부재는 관리 소홀이 아니라 식민지기에 관한 사실입니다.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고, 1951년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72년에는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되었고, 197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습니다. 1991년 고향인 병천면 용두리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1996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명예졸업장의 연도가 1996년입니다. 1918년에 고등과 1학년에 올랐고, 그 학년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두 곳을 순서대로, 하루에 보세요. 대한문이 먼저입니다. 소복을 입은 학생 다섯이 망곡을 한 자리에 서 보고, 그다음 서대문형무소로 갑니다. 1920년 3월 1일의 만세가 벌어진 곳입니다. 두 곳 사이의 거리는 짧고, 그 거리가 그의 성인기 전부입니다.
유관순과 이어지는 곳
자주 묻는 질문
유관순은 몇 살이었나요?
1902년 12월 16일에 태어나 1920년 9월 28일 열여덟에 순국했습니다. 3·1운동 때와 한 달 뒤 아우내 만세운동 때 열여섯이었습니다.
아우내 만세운동은 무엇인가요?
1919년 4월 1일 병천 시장에서 조인원,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등과 함께 수천 명이 참여한 시위를 주도한 사건입니다. 그날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왜 상고하지 않았나요?
공주에서 5년형,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받았습니다. 함께 재판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그는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고하지 않았습니다.
1920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신애·어윤희 등과 오후 2시에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시작했습니다. 3천여 명의 수감자가 호응했고, 만세 소리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했습니다. 이 일로 그와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죽었고, 묘는 어디에 있나요?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 끝에 1920년 9월 28일에 순국했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수형기록표 사진으로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일제가 그곳을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미아리로 이장되었고, 이후 묘를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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