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집에서 나라를 다스린 사람
그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열두 살에 왕이 된 것은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10여 년 동안 운현궁에서 정치를 했습니다. 대문이 넷이었고 지금은 하나 남았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에 불탄 경복궁을 다시 지었고, 1868년에 서원을 없애라 명해 47곳이 남았습니다.
언어

서울에는 궁이 다섯 있고, 19세기의 어느 10년 동안 나라는 그중 어디에서도 다스려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삼일대로에 있는 집 한 채에서 다스려졌습니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이고,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합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아버지였습니다. 왕은 아니었습니다.
한눈에 보기
궁이 아니라 사저
운현궁은 대원군의 사저이자 고종의 잠저였고, 대원군 정치활동의 근거지였습니다.
고종이 열두 살까지 산 집
장차 왕이 될 사람이 나고 자란 곳입니다.
경복궁을 다시 지었다
10여 년간 정치를 하며 세도정치의 폐단을 제거하고 인사·재정을 개혁했으며, 임진왜란에 불탄 궁을 다시 세웠습니다.
대문 넷 중 하나
전성기에는 사대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후문 하나만 남았습니다.
집이 정청이 되기까지
전개가 빠르고, 전부 한 해 안입니다.
고종은 1863년 12월 13일에 즉위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 대왕대비의 하교로 운현궁의 신·증축 공사가 시작되었고, 9개월 만인 1864년 9월에 노락당과 노안당이 준공되었습니다. 당시 대왕대비는 호조에 명하여 운현궁에 매달 쌀 10섬과 100냥씩을 보내고, 신·증축 비용으로 17,830냥을 지원했습니다.
국가의 재정 부서가 사저에 매달 봉급을 보내는 상황이 곧 그때의 헌정 상태입니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북쪽에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주요 건물은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입니다.
지위는 건물 자체에 적혀 있습니다. 상량문에 의하면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조차 이야기의 한 조각입니다. 「운현」이란 당시 서운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고,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습니다. 철종 때에는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했습니다.
10여 년으로 무엇을 했는가
유산 기록은 그 사업을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천천히 읽을 값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단을 제거하고 인사·재정들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복궁을 다시 짓기도 하였습니다.
세도정치란 한 외척 가문의 지배입니다. 인사와 재정을 고친다는 것이 그것을 깨는 일입니다. 그리고 궁은 그 사업의 눈에 보이는 절반입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이후로 폐허였고, 그가 다시 세웠습니다. 지금 그곳을 걷는 사람이 보는 것의 대부분이 그 결정의 하류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안동까지 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1868년 그는 서원을 철폐하라 명했고, 병산서원은 그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7곳이 남았다는 숫자가 그 명령의 크기입니다. 서원은 사족의 지역 권력 기반이었고, 그것을 닫는 일은 외척을 깨는 일과 같은 기획을 다른 과녁에 겨눈 것입니다. 병산서원은 그 예외 안에 서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가례, 그리고 한 사람을 위한 문
고종 3년(1866)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렀고, 가례 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했습니다. 당시 가례 행사를 위하여 수행원 1,641명과 준마 700필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왕의 혼례를 궁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서 치렀다는 사실이 1866년의 무게중심이 어디였는지를 말해 줍니다.
두 곳 사이의 왕래는 건축으로 제도화되어 있었습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 공근문의 사대문이 있었고,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습니다. 본래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부근이었습니다.
사대문 가운데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가서 보면 없는 것들
이곳은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빠른 유적이고, 기록도 그 점에 유난히 솔직합니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사적 지정 자체가 서로 다른 둘을 합친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에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쓰던 서양식 건물입니다. 19세기의 권력 기반과 식민지기의 학교 건물이 한 지정 안에 들어 있습니다.
큰아들 이재면 부부가 거처하던 영로당 역시 운현궁의 일부였습니다. 지금은 소유가 바뀌어 별도의 문화재입니다.
소유권이 다시 후손에게 넘어간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고, 그해 9월 21일 대원군의 5대손 이청에게 소유권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걷는 마당은 파편입니다. 사대문과 헐린 사랑채와 사라진 사당 둘을 알고 보면, 작고 단정한 이 마당이 다시 「나라를 다스리던 자리」로 돌아옵니다.
노안당에 서서 남쪽을 본 다음, 경복궁까지 걸어 보세요. 집 앞쪽의 사랑채가 실무가 이루어지던 자리이고, 그가 다시 세운 궁은 걸어갈 거리에 있습니다. 집을 먼저, 궁을 나중에 — 그것이 19세기가 실제로 벌어진 순서입니다.
대원군과 이어지는 곳
자주 묻는 질문
흥선대원군은 왕이었나요?
아닙니다. 고종의 아버지입니다. 운현궁은 그의 사저였고, 아들이 즉위하자 그곳에서 10여 년간 정치를 했으며 집은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저인데 왜 「궁」이라고 하나요?
고종의 잠저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왕이 될 사람이 열두 살까지 살던 집입니다. 「운현」이라는 이름은 옛 서운관 앞 고개에서 왔고, 철종 때에는 그 옛 관상감 터에 왕기가 있다는 민요가 유행했습니다.
그가 실제로 바꾼 것은 무엇인가요?
유산 기록은 10여 년간 세도정치의 폐단을 제거하고 인사·재정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탄 경복궁을 다시 지었다고 적습니다.
1868년 서원철폐령은 무엇인가요?
지방의 서원을 없애라는 명령입니다. 그 규모는 예외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안동의 병산서원이 그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 서원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운현궁은 왜 이렇게 작아 보이나요?
많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일부는 덕성여자대학과 방송국 시설이 쓰고 있고, 아재당은 헐렸으며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사라졌습니다. 한때 넷이던 대문 가운데 지금은 후문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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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확인일:
공식 출처
- 사실 확인: 국가유산포털 — 사적 서울 운현궁 (1977년 11월 22일 지정, 16,646㎡, 조선시대 후기;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이며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 한옥은 남쪽 앞에 대원군의 사랑채 노안당, 뒤쪽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고 북쪽에 안채인 노락당;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음; 10여 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단을 제거하고 인사·재정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복궁을 다시 지음;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대학으로 사용되고 방송국 시설이 있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이 헐리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짐; 2011년 7월 28일 「운현궁 → 서울 운현궁」으로 명칭 변경 고시)
- 사실 확인: 운현궁 — 운현궁의 역사 (사적 제257호,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고종의 잠저이자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대원군 정치활동의 근거지; 고종이 12살까지 살았음; 「운현」은 서운관 앞 고개 이름으로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통용,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인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민요가 유행; 고종 즉위(1863.12.13.) 한 달쯤 뒤 대왕대비의 하교로 신·증축 공사가 시작되어 9개월 만인 1864년 9월 노락당과 노안당 준공, 대왕대비가 호조에 명해 매달 쌀 10섬과 100냥을 보내고 신·증축 비용 17,830냥을 지원; 현재 남은 주요 건물은 노안당·노락당·이로당이며 큰아들 이재면 부부가 거처하던 영로당도 운현궁의 일부였음; 본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부근; 전성기에는 정문·후문·경근문·공근문의 사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았고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 출입에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음; 고종 3년(1866) 3월 21일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렀고 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했으며 수행원 1,641명과 준마 700필이 동원됨; 상량문에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 다음의 존칭인 「합하」라 하고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 함; 1948년 미군정청 공문으로 소유권이 후손에게 넘어가 그해 9월 21일 5대손 이청에게 확정)
- 사실 확인: 국가유산포털 — 사적 안동 병산서원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