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919)
왜 하필 3월 1일이었는지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독립선언서 2만 1,000매가 어떻게 인쇄됐는지, 민족대표가 왜 33인인지, 그리고 서울에서 이 날을 볼 수 있는 곳.
언어

3월 1일은 한국의 공휴일입니다. 여행 중이라면 박물관 운영 시간이 달라지는 날로 먼저 만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날이 무엇을 기념하는지는 대개 "1919년의 독립운동"으로 요약되지만, 실제 기록은 훨씬 구체적입니다. 왜 3월 1일이었는지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이 운동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 줍니다.
한눈에 보기
날짜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종의 인산일은 전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 하여, 2일은 일요일 안식일이라 하여 피한 결과 3월 1일이 되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천도교·기독교·학생층의 계획이 통합되고 불교 측 한용운·백용성이 가담해 33인으로 결정되었습니다.
2만 1,000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보성사에서 2월 27일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비밀리에 인쇄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1919년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헌법에서 국호로 제정한 뒤 지금까지 쓰입니다.
먼저 도쿄에서 시작됐습니다 — 2·8독립선언
서울보다 3주 앞선 사건이 있습니다.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일본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한국 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선언서를 각국 대사·공사, 일본정부 요인, 귀족원·중의원 양원의원, 조선총독, 신문사, 잡지사와 여러 학자들에게 우송했습니다.
같은 날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백관수가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11명의 대표가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습니다. 선언식이 끝날 무렵 동경 경시청에서 급파된 경찰대가 대회장을 포위했고, 충돌 끝에 이광수를 제외한 10명의 대표가 일본 경찰에 잡혔습니다.
이후 유학생들은 전원 귀국할 것을 결의하고 국내로 돌아와,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에 합류했습니다.
세 가지가 겹쳤습니다
백과사전은 국내에서 운동이 본격화된 계기를 세 가지가 겹친 것으로 설명합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그리고 고종황제의 붕어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한데 겹쳐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일부 민족지도자들은 이때가 한국 민족의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거족적인 운동을 계획했습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웠던 종교단체와 교육기관에서 각각 계획을 세웠지만, 나중에는 거족적이고 일원화된 운동을 위해 서로 통합하게 됩니다. 천도교·기독교·학생층의 계획이 하나로 합쳐지고 불교 측의 한용운·백용성이 가담하면서 민족대표는 모두 33인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통치 구조를 알면 이 조합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됩니다. 무장이 전면적으로 해제되고 헌병이 민간인을 관리하던 상황에서, 조직을 가진 채 비교적 자유롭게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종교단체와 학교였습니다.
무엇을 하기로 했나 — 그리고 2만 1,000매
실천 방법은 세 가지로 합의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국민 여론을 환기시키고,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양원 및 조선총독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며,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국제여론으로 일본에 압력을 가해 독립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모두 무력이 아니라 문서와 여론을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했고,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 인쇄소 사장 이종일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는 공장감독 김홍규와 함께 2월 27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2만 1,000매를 인쇄했습니다.
네 시간, 2만 1,000매. 이 숫자가 이 운동이 어떤 규모로 준비되었는지를 가장 잘 보여 줍니다.
왜 3월 1일인가
날짜는 우연이 아니었고, 두 가지 반대 의견이 남긴 결과였습니다.
인산일(고종의 국장일)을 택하는 것은 전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천도교 측의 의견이 있었고, 2일은 일요일이므로 안식일이라 피하자는 기독교 측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결국 3월 1일로 결정되었습니다.
여러 종교가 함께 움직인 운동이었기 때문에, 날짜조차 서로의 신념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정해졌다는 뜻입니다. 3·1절이라는 공휴일의 이름 안에 그 협의의 결과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날이 남긴 것, 그리고 볼 수 있는 곳
가장 오래 남은 결과는 이름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헌법에서 국호로 제정한 이후 현재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지금 여권과 국가명에 적히는 그 이름이 이 해에 결정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이 운동과 직접 이어지는 장소는 탑골공원(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곳)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입니다. 탑골공원은 종로 한복판에 있어 궁궐 일정에 자연스럽게 붙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이 운동 이후의 수감과 처벌을 다루는 곳이라, 순서대로 보면 하루의 흐름이 만들어집니다.
3·1운동과 이어지는 곳
자주 묻는 질문
왜 3월 1일이었나요?
고종의 인산일을 택하는 것은 전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천도교 측의 의견과, 2일은 일요일이라 안식일이므로 피하자는 기독교 측의 의견이 있어 3월 1일로 결정되었습니다.
민족대표는 왜 33인인가요?
천도교·기독교·학생층의 개별 계획이 통합되고 불교 측의 한용운·백용성이 가담하면서 33인으로 결정되었습니다.
2·8독립선언은 무엇인가요?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입니다. 오전에 각국 대사와 일본 정부 요인 등에게 선언서를 우송하고 오후에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낭독했으며, 경찰과 충돌해 대표 11명 중 10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누가 썼나요?
최남선이 기초했습니다. 보성사 인쇄소에서 2월 27일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비밀리에 2만 1,000매가 인쇄되었습니다.
3·1운동은 무장 봉기였나요?
실천 방법으로 합의된 것은 독립선언서 발표,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에 대한 국권반환요구서 발송,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독립청원서 제출이었습니다. 모두 문서와 국제여론을 수단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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