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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삼국을 통일한 왕의 무덤은 바다에 있고, 그 밑을 아무도 열어 본 적이 없다

재위 21년이 거의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백제 부흥군을 정리하고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는 당나라와 다시 싸워 매초성과 기벌포에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죽으면서 화장해 동해에 묻어 달라고,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고 했습니다. 그 바위 안쪽의 넓적한 돌 밑은 수중 발굴이 실시되지 않아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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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앞바다에 낮게 솟은 문무대왕릉 바위섬. 흰 파도가 바위 둘레에서 부서지고, 앞쪽에는 자갈 해변이 이어진다

경주 감포 앞바다에 낮게 솟은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크지 않습니다.

바닷속 바위에 왕릉을 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지금도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한눈에 보기

  • 재위 21년, 거의 전쟁

    백제 부흥군 → 고구려 → 당나라. 삼국통일은 그 21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유언은 용이 되겠다는 것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했습니다.

  • 안쪽에 넓적한 돌

    사방 수로 안쪽 공간에 남북으로 길게 놓인 큰 돌이 있고, 수면이 그 돌을 약간 덮습니다.

  • 열어 본 적이 없다

    수중 발굴 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그 돌 밑에 무엇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통일은 사건이 아니라 21년짜리 전쟁이었다

「삼국통일」은 한 줄로 적히지만 그의 재위 전체를 잡아먹었습니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미처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해 그 과업을 완수했고, 그러므로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은 거의 백제 부흥군과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순서는 이렇습니다.

  1. 백제 부흥군. 663년 부흥군의 본거지 주류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함락하고, 끝까지 항거하던 임존성마저 정복해 부흥 운동을 끝냈습니다.
  2. 고구려. 668년 9월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습니다.
  3. 당나라.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이 왕의 진짜 이야기입니다.

🔴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 그가 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670년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이끌던 안승이 4,000호를 이끌고 망명해 오자, 문무왕은 그를 금마저에 머무르게 하고 고구려왕에 봉했습니다. 멸망한 나라의 왕을 자기 땅 안에 세운 것입니다. 당나라와 싸우기 위한 배치였습니다.

땅에서 한 번, 바다에서 한 번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한반도 전체를 자기 영토로 삼으려 했고, 신라는 다시 전쟁에 들어갑니다.

승부가 갈린 것은 두 번입니다.

675년, 이근행이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신라군이 매초성에서 크게 격파했습니다. 이 승리는 북쪽 육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676년, 해로로 계속 남하하던 설인귀의 군대를 사찬 시득이 기벌포에서 격파함으로써 신라는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했습니다.

결과는 지도에 남았습니다. 당나라는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겼고, 신라는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습니다.

🔵 전쟁만 한 것은 아닙니다. 678년 북원소경, 680년 금관소경을 두어 신문왕 대에 완성되는 5소경제의 기틀을 마련했고, 675년에는 백사와 주군의 동인을 제작해 반포했습니다. 도장을 만들어 돌린다는 것은 문서로 굴러가는 나라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용이 되겠다는 유언

재위 21년만인 681년에 승하하자,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 유언은 불교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화장한 유골을 동해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으므로,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라고 부릅니다.

이 유언을 읽는 방식에 따라 이 바위가 달라집니다. 신화로 읽으면 용 이야기이고, 정책으로 읽으면 국경 방어를 사후에도 계속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앞의 두 절을 읽고 오면 후자 쪽이 더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 21년을 국경에 쓴 사람입니다.

바위는 설계된 것처럼 생겼다

가까이서 보면 이 바위는 그냥 바위가 아닙니다.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자연 바위이고, 남쪽으로 더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둘레에는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이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마치 호석처럼 보입니다.

호석은 왕릉 둘레를 두르는 돌입니다. 육지의 무덤이 쓰는 형식이 바다에서 반복되는 셈입니다.

대왕암에 올라 보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드는 수로를 마련한 것처럼 되어 있고, 특히 동쪽 수로 덕분에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의 수면은 항상 잔잔하게 유지됩니다.

그리고 그 안쪽에 핵심이 있습니다. 비교적 넓은 수면 한가운데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도 큰 돌이 있고,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됩니다.

🔵 사방 수로라는 형식에는 다른 독법도 있습니다. 사방에 문이 마련된 인도 산치탑이나,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하부의 사방 통로처럼, 부처의 사리를 보관한 탑의 형식이 적용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화장한 왕의 유골을 사리처럼 다룬 셈입니다.

그 밑은 확인된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넓적한 돌 밑에는 무엇이 있는가.

문무왕의 유골을 이 돌 밑에 어떤 장치를 해서 보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중 발굴 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이 널돌처럼 생긴 돌 밑에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 이 문장을 그대로 옮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수중릉」이라는 말은 확정된 사실처럼 들리는데, 확정된 것은 기록과 형태이지 내용물이 아닙니다. 백과사전이 그 경계에서 멈춘 자리에서 이 글도 멈춥니다.

다만 근거는 있습니다.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안쪽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사람 손이 닿았다는 것까지가 관측이고, 그 아래는 아직 추정입니다.

가서 보기

문무대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의 해변 앞바다에 있습니다. 전시실이 아니라 바다이므로, 보는 데 표가 필요하지 않고 대신 날씨와 파도가 그날의 조건입니다.

🔵 함께 볼 것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왕릉이 내려다보이는 서북쪽 산 능선 아래에는 아들 신문왕이 창건한 감은사 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무덤이 보이는 자리에 아들이 절을 세운 배치입니다.

찾아가는 길은 문무대왕릉 장소 페이지에 있습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썰물 때 가시면 둘레의 작은 바위들이 드러납니다. 백과사전이 호석에 비유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파도를 보십시오. 바깥에서 큰 물결이 쳐도 바위 안쪽은 잔잔합니다 — 동쪽 수로가 하는 일이고, 이 바위가 「그냥 바위처럼 보이지 않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문무왕과 이어지는 곳

그 앞의 신라는 선덕여왕을 다룬 글에, 통일 이후의 불교는 통일신라 불교를 다룬 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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