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스무 번 넘게 벼슬을 사양했고, 임금은 화공을 보내 그가 사는 곳을 그려 오게 했다
1543년 이후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스무 번이 넘습니다. 명종은 그를 불러내지 못하자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풍경을 그리게 하고 병풍을 만들어 조석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1560년에 지은 도산서당은 서원이 아니라 서당이고, 안동에서 여러분이 보는 것은 그 건물과 그 뒤에 붙은 것들입니다.
언어

임금이 그를 불러내지 못했습니다.
명종은 예를 두터이 해 자주 출사를 종용했으나 이황이 듣지 않자,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 탄식 — 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에 송인에게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 조석으로 그를 흠모했다고 합니다.
안동에서 여러분이 보게 되는 것은 그 화공이 그리러 갔던 자리입니다.
한눈에 보기
사양 20여 회
1543년 이후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스무 번이 넘습니다.
1560년, 서당
그가 지은 것은 도산서당입니다. 이로부터 7년간 거기 기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사액서원의 시초
풍기군수 시절 백운동서원에 편액·서적·학전을 내려 달라 청원해 실현시켰고, 그것이 소수서원입니다.
마지막 아침
평소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뒤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름이 지명에서 왔고, 지명은 그가 바꿨다
「퇴계」는 물러날 퇴에 시내 계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그가 지은 말이 아니라 고쳐 부른 지명입니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한 그는 1546년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얽어 독서에 전념하는 생활에 들어갔고,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습니다.
물러나는 일이 그의 호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호는 은유가 아니라 주소였습니다.
그가 나고 자란 곳도 그 근처입니다.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 —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 에서 7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고,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했습니다. 열두 살에 작은아버지 이우에게 『논어』를 배웠습니다.
🔵 몸이 약했던 데에도 기록된 계기가 있습니다. 스무 살을 전후해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서원 제도를 만든 사람이 서원에 살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서원과 붙어 다니지만, 정작 그가 세운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먼저 제도 쪽입니다. 풍기군수로 있을 때, 그는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과 서적과 학전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해 실현시켰습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입니다.
즉 그는 사립 서원을 국가가 인정하고 지원하는 경로를 처음으로 뚫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지은 것은 서당이었습니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아호를 「도옹」이라 정했으며,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와 수양과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했습니다.
이 구분은 안동에 가면 눈에 보입니다. 도산서원 경내에서 가장 작고 가장 꾸밈없는 건물들이 그가 쓰던 쪽이고, 이 글의 사진에 있는 농운정사도 그쪽입니다. 단청이 없고, 기둥은 다듬다 만 것처럼 보이고, 처마 밑에 「時習齋」— 때때로 익힌다 — 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스무 번 넘게 사양한 사람의 이력서
그의 관직 이력은 임명의 목록이 아니라 사양의 목록으로 읽어야 합니다.
1543년 이후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릅니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 — 여러 차례 고사했습니다. 명종이 자헌대부·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지만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끝내 한 번 올라갑니다. 68세의 노령에 대제학과 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노환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를 저술해 어린 국왕에게 바쳤습니다.
물러나는 것이 게으름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이 순서에 있습니다. 스무 번을 사양한 사람이 마지막에 올린 것은 사직서가 아니라 교과서였습니다.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1570년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됐습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의정부영의정을 추증했으며,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됐습니다. 그런데 무덤은 그 격을 따르지 않습니다.
산소에는 유계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습니다.
영의정의 예로 치른 장례와, 다듬지 않은 돌 하나. 그 두 가지가 같은 사람의 것입니다.
가서 보기
도산서원은 안동 시내에서 떨어져 있고, 관람 시간과 찾아가는 길은 도산서원 장소 페이지에 있습니다.
🔵 가시거든 건물의 격차를 보십시오. 그가 쓰던 서당 쪽은 작고 꾸밈이 없고, 그 바깥으로 갈수록 규모와 장식이 커집니다. 앞의 것은 그가 지었고 뒤의 것은 그를 기려 지은 것이니, 그 차이 자체가 이 사람에 관한 정보입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농운정사 처마 밑의 「時習齋」 현판을 찾아보십시오. 『논어』 첫 문장의 「학이시습지」에서 온 이름이고, 그가 열두 살에 작은아버지에게 배운 책이 바로 그 『논어』입니다.
그리고 단청을 찾지 마십시오. 없습니다. 그것이 이 건물군의 앞쪽 절반이 말하는 방식입니다.
이황과 이어지는 곳
그의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 류성룡이고,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류성룡을 다룬 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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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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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확인일:
공식 출처
- 사실 확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황(본관 진보, 자 경호, 호 퇴계·퇴도·도수;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출생;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자람;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움;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됨; 1527년 향시 진사·생원 초시 합격, 1534년 문과 급제해 승문원부정자;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지어 독서에 전념했으며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음;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 이어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 풍기군수 재임 중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서적·학전을 하사할 것을 조정에 청원해 실현시켰고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인 소수서원;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아호를 도옹이라 정했으며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 1543년 이후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름; 명종이 자주 출사를 종용했으나 듣지 않자 근신들과 「초현부지탄」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한 뒤 송인에게 도산기 및 도산잡영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 조석으로 흠모했다 함; 68세에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렸으며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를 저술해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침; 기대승과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 1570년 11월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영의정을 추증했으나 산소에는 유계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 새긴 묘비만 세워짐)
- 사실 확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유성룡(본관 풍산, 호 서애; 이황의 문인으로 김성일과 동문수학; 임진왜란 때 영의정; 병산서원 등에 제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