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 백제가 쫓겨 와서 만든 수도,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 쓰인 언덕
공산성은 백제가 고른 자리가 아니라 밀려서 온 자리입니다. 그래서 강을 등지고 계곡을 감싼 모양이 되었고, 백제가 떠난 뒤에도 조선시대까지 쓰였습니다. 도읍이었던 기간은 짧고, 성으로 쓰인 기간은 그보다 훨씬 깁니다.
언어

수도를 옮기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더 좋은 자리를 찾았거나, 있던 자리를 잃었거나.
공산성은 두 번째입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수도를 잃고 남쪽으로 내려와 금강가의 이 야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사정이 성의 생김새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곳은 「백제가 어떤 나라였나」보다 「백제가 어떤 처지였나」를 먼저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관람 정보와 위치는 공산성의 장소 페이지에 있습니다. 이 글은 이 성이 무엇을 위해 있었고, 도읍이 떠난 뒤에도 왜 계속 쓰였는가를 다룹니다. 백제가 놓인 자리는 삼국시대 개관에 있습니다.
한눈에 보기
538년까지 도성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백제의 도성이었고, 백제 때 이름은 웅진성이었습니다.
흙에서 돌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고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습니다.
문 넷 가운데 둘은 복원
남문 진남루와 북문 공북루는 남아 있었고, 동문터와 서문터에는 1993년에 영동루와 금서루를 복원했습니다.
2015년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이루는 여덟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538년이라는 끝
먼저 숫자를 하나 들고 시작하는 편이 좋습니다.
공산성은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습니다. 백제가 700년 가까이 이어진 것에 비하면 웅진에 머문 기간은 짧고, 그 짧음이 이 자리의 성격입니다.
백제는 이곳에서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숨을 돌리고, 다시 넓은 곳으로 나갔습니다. 그 다음 자리가 부소산성입니다.
그래서 공산성을 볼 때 「백제의 수도」라는 말에서 기대하게 되는 것 — 넓은 평지, 반듯한 격자, 큰 궁궐터 — 은 여기 없습니다. 대신 계곡이 있고 능선이 있고 강이 있습니다.
성이 강을 등지고 있다는 것
공산성의 북문은 공북루입니다. 성문을 나서면 나루를 통하여 금강을 건너게 되어 있습니다.
문 하나가 성의 논리를 다 설명합니다. 이 성은 강을 앞에 두고 적을 막는 성이 아니라, 강을 등에 지고 물러설 곳을 확보한 성입니다. 물러설 곳이 있다는 것은 뒤가 트여 있다는 뜻이고, 뒤가 트여 있다는 것은 이 자리가 최종 방어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규모는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400m 정도의 장방형입니다. 걸어서 한 바퀴 돌 수 있는 크기이고, 도는 동안 성벽이 계곡을 따라 오르내립니다. 산등성이만 두르는 것이 아니라 계곡을 안에 넣고 감싸는 방식이라, 성 안에 물과 평지가 함께 들어옵니다.
토성과 석성이 한 벽에 이어져 있다
지금 걷는 성벽은 한 시대의 것이 아닙니다.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습니다. 그러니 「백제의 성벽을 걷는다」는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선은 백제의 것이고 돌은 조선의 것입니다.
한국의 오래된 건조물에서 이런 일은 예외가 아니라 기본입니다. 목조 건물은 수리하고 다시 세우는 것이 일상이고, 성벽은 무너진 자리를 그때의 기술로 다시 쌓습니다. 남는 것은 재료가 아니라 자리입니다.
이름도 그렇게 겹쳐 있습니다. 백제 때에는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이라 불렀습니다. 한 언덕이 세 이름을 가졌고, 세 이름이 각각 그 시대의 용도를 말합니다.
도읍이 떠난 뒤가 더 길다
백제가 부여로 옮긴 뒤에도 이 성은 계속 쓰였습니다. 그 목록이 길고, 대부분이 좋은 일이 아닙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나라가 무너진 직후에 왕이 향한 곳이 옛 도읍의 성이었다는 것은, 이 자리가 여전히 「버틸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800년 넘게 떨어진 두 사건이 같은 언덕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공산성의 진짜 이력은 「백제의 도성」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올라가던 언덕」입니다. 도읍이었던 기간은 그 긴 이력의 첫 대목일 뿐입니다.
문 넷 가운데 둘은 1993년의 것
실물을 볼 때 알아 두면 좋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 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 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습니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기와지붕 문루가 금서루입니다. 사진에 가장 많이 나오는 그 문이 1993년에 세운 것이라는 사실은 실망할 일이 아니라 읽을거리입니다. 남아 있는 것과 복원한 것이 한 성 안에 나란히 있고, 어느 쪽인지 알고 보면 성벽의 나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자리는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면적은 376,645.3㎡입니다.
공북루까지 내려가 보세요. 성의 논리가 거기서 가장 분명합니다 — 문 밖이 바로 강이고, 그 너머가 백제가 두고 온 북쪽입니다. 성벽 위를 걷는 것은 어느 구간에서든 할 수 있지만, 「왜 하필 여기였나」에 답하는 자리는 북쪽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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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공산성은 얼마나 오래 백제의 수도였나요?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입니다. 백제 때 이 성의 이름은 웅진성이었습니다.
지금 보는 성벽이 백제의 것인가요?
선은 백제의 것이고 돌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고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습니다.
입구의 문루는 원래 있던 건가요?
서문터의 금서루와 동문터의 영동루는 1993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 있던 문입니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쓰였나요?
예. 멸망 직후 의자왕이 잠시 머물렀고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 되었으며, 822년 김헌창의 난과 1623년 이괄의 난 때도 쓰였습니다.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했습니다.
왜 세계유산인가요?
2015년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여덟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네스코는 이 유적군을 475~660년의 고고 유적 여덟 곳으로 설명하고,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을 웅진 도읍에 딸린 것으로 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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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확인일:
공식 출처
- 사실 확인: 국가유산포털 — 사적 공주 공산성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376,645.3㎡, 충남 공주시 산성동 2번지; 백제 성왕 16년(538) 부여 천도까지의 백제 도성; 원래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개축; 동서 약 800m·남북 약 400m의 장방형; 백제 때 웅진성, 고려 때 공주산성·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 쌍수산성; 남문 진남루와 북문 공북루는 남고 동문터·서문터에 1993년 영동루와 금서루 복원; 백제 멸망 직후 의자왕이 머물고 백제부흥운동의 거점; 822년 김헌창의 난, 1623년 이괄의 난으로 인조 피난)
- 사실 확인: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 백제역사유적지구(1477). 475~660년의 고고 유적 여덟 곳으로 구성되며,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은 웅진 도읍에 딸린다고 명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