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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삼국시대에 무덤 주인의 이름을 아는 유일한 왕릉

1971년, 5·6호분 배수공사를 하다가 손대지 않은 무덤 하나가 나왔습니다. 안에는 지석 두 장이 있었고, 거기 적힌 이름 덕분에 이 무덤은 한국 고대사에서 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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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소나무 사이 남향 경사면에 잔디로 덮인 둥근 봉분들이 늘어선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위에서 본 모습

한국 고대사를 읽다 보면 「~로 추정된다」가 자주 나옵니다. 무덤은 특히 그렇습니다. 형식으로 시기를 짐작하고, 껴묻거리로 신분을 짐작하고, 위치로 계보를 짐작합니다.

무령왕릉은 짐작하지 않아도 되는 무덤입니다. 안에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무덤 하나가 백제사 전체의 시계를 맞추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관람 정보와 위치는 왕릉원의 장소 페이지에 있습니다. 이 글은 여기서 무엇이 나왔고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다룹니다.

한눈에 보기

  • 일곱 기의 왕릉

    표고 약 120m의 송산을 북쪽 주산으로 삼은 중턱 남쪽 경사면에 고분 7기가 있습니다.

  • 돌방무덤과 벽돌무덤

    1~5호분은 굴식 돌방무덤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벽돌로 쌓은 무덤입니다.

  • 1971년 발견

    무령왕릉은 5·6호분 보수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되었습니다.

  • 지석 두 장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함께 나왔고,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입니다.

도굴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

이 자리의 사정을 먼저 알아 두는 편이 좋습니다.

1~6호분은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이 언덕에서 나온 이야기의 대부분은 비어 있는 방을 보고 쓴 것입니다. 구조는 알 수 있지만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누가 묻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령왕릉은 그 예외입니다. 1971년에 발견될 때까지 아무도 그 무덤이 거기 있는 줄 몰랐고, 그래서 손대지 않은 채로 열렸습니다.

배수공사를 하다가

발견의 경위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이 이야기의 요점입니다.

무령왕릉은 1971년 5·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습니다. 옆 무덤을 손보다가 나온 무덤입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계곡 서쪽에 5호분과 함께 붙어 있어서, 한쪽을 건드리면 다른 쪽이 드러나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습니다. 지금 왕릉원을 걸으면 이 배치가 그대로 보입니다.

지석 두 장이 하는 일

안에서 나온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금붙이가 아니라 돌 두 장이었습니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6행에 걸쳐 새겼고, 왕비의 지석은 같은 크기에 4행입니다. 왕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이것이 이 무덤의 전부입니다. 문헌에 적힌 왕과 땅에서 나온 무덤이 서로를 확인해 준 것입니다. 한쪽만 있으면 기록이고, 둘이 맞으면 사실입니다.

지석은 묘비가 아니라 계약서에 가깝습니다.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 넣은 매지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입니다.

원래 매지권은 무령왕을 장사지낼 때 만들어졌고, 그 뒤 왕비를 합장할 때 이 매지권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에 관한 묘지문을 새겼습니다. 돌 한 장이 두 번 쓰인 것이고, 그 재사용이 두 장례 사이의 시간을 증명합니다.

지석 2매는 1974년 7월 9일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있습니다.

벽돌로 쌓은 무덤이라는 것

무덤의 만듦새 자체도 백제가 어디와 이어져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 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입니다.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고,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한 언덕 위에서 두 방향의 영향이 만납니다.

6호분은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하며, 활 모양 천장의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고 오수전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습니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무령왕릉의 벽에는 등자리가 5개 있습니다.

같은 시기, 같은 기법, 다른 개수. 이런 차이가 두 무덤의 순서를 읽는 재료가 됩니다.

지금 가면 무엇을 보나

솔직하게 적어 둘 것이 있습니다. 무덤 안은 볼 수 없습니다. 보존을 위해 닫혀 있고, 밖에서 보는 것은 잔디로 덮인 봉분들과 그 배치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두 자리로 나뉜 유적입니다. 무덤은 여기 있고, 무덤에서 나온 것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있습니다. 지석도, 왕과 왕비의 껴묻거리도 그쪽입니다. 순서를 정한다면 언덕을 먼저 걷고 박물관을 나중에 보는 편이 낫습니다 — 빈 봉분을 먼저 본 다음에야 진열장 안의 물건이 어디서 나왔는지 실감이 됩니다.

이 자리는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면적은 541,524.4㎡입니다. 2015년에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여덟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봉분의 크기를 서로 비교해 보세요. 1~6호분과 무령왕릉이 같은 양식이면서 구조와 규모에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봅니다. 눈으로 크기를 견주는 일이 그대로 연대를 읽는 연습이 됩니다.

같이 보면 좋은 곳

자주 묻는 질문

무령왕릉은 어떻게 발견되었나요?

1971년 5·6호분의 보수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도 그 자리에 무덤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왜 무덤 주인을 알 수 있나요?

지석 2매가 함께 나왔기 때문입니다. 왕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입니다.

다른 무덤들은 왜 이야기가 적나요?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된 상태였습니다. 구조와 형식은 일제강점기 조사로 밝혀졌지만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덤 안에 들어갈 수 있나요?

무덤 내부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밖에서 봉분과 배치를 보고, 출토품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봅니다.

왜 벽돌로 쌓았나요?

6호분과 무령왕릉은 백제의 벽돌무덤이고, 이 형식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6호분 널방의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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