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 절이 사라진 자리에서 탑 하나가 축을 지키고 있다
정림사지에는 절이 없습니다. 남은 것은 백제 때 세운 오층석탑과 고려 때 만든 석불좌상뿐입니다. 그런데 그 탑의 위치 덕분에 중문에서 금당을 지나 강당에 이르는 남북 축이 빈 땅 위에 그대로 읽힙니다. 그리고 이 탑에는 정복자가 새긴 글귀 때문에 붙었던 잘못된 이름이 있습니다.
언어

폐사지를 처음 보면 대개 실망합니다. 넓은 흙바닥이 있고, 낮은 돌 윤곽이 있고, 안내판이 있습니다.
정림사지는 그 실망을 뒤집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절이 통째로 사라졌는데도 절의 설계가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가운데 서 있는 탑 하나입니다.
관람 정보와 위치는 정림사지의 장소 페이지에 있습니다. 이 글은 이 절이 어떤 모양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탑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다룹니다.
한눈에 보기
남북 일직선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 축 위에 놓이고 복도가 건물을 감쌉니다.
회랑이 사다리꼴이다
중심부를 두른 복도가 정사각형이 아니라 북쪽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입니다.
백제 석탑은 둘뿐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기만 남은 백제시대 석탑입니다.
'평제탑'이라는 오명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이라는 글귀를 남겨, 한때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렸습니다.
절 이름은 기와 한 장이 알려 주었다
먼저 이름부터입니다. 이 절이 백제 때 무엇이라 불렸는지는 모릅니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28년입니다. 백제가 망하고 368년 뒤의 이름입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 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 「정림사지」라는 이름은 고려가 이 자리를 다시 썼다는 증거이지 백제의 이름이 아닙니다. 유적의 이름이 유적의 마지막 사용자에게서 오는 일은 드물지 않고, 여기서는 그 사정이 기와 한 장에 적혀 있습니다.
빈 땅에서 설계를 읽는 법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입니다.
이 한 문장이 절터를 걷는 방법입니다. 남쪽 중문 자리에 서서 북쪽을 보면, 탑과 금당터와 강당터가 한 줄에 있습니다. 탑이 그 줄 위에 실제로 서 있기 때문에 나머지 자리들이 어디였는지 눈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예외가 하나 있습니다.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축은 반듯한데 회랑은 반듯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대칭을 기대하고 갔다가 도면을 보면 어긋나 보이는데, 그 어긋남이 이 절의 특징입니다.
중문 앞의 연못은 발굴조사에서 드러나 정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는 물은 복원된 것이고, 원래 거기 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로 확인된 것입니다.
탑에 새겨진 남의 글씨
오층석탑은 국보이고, 이 탑에는 다른 데 없는 사연이 붙어 있습니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 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정복자가 남의 나라 탑에 전승 기념문을 새겼고, 그 글씨 때문에 후대가 탑의 국적을 잘못 알았습니다. 탑은 백제가 세웠고 글씨는 당이 새겼는데, 이름은 글씨를 따라갔습니다.
지금은 바로잡혀 있습니다. 이름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고,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백제시대 후기 7세기의 것입니다.
돌로 목조 건물을 지었다
탑을 가까이서 보면 왜 이것이 중요한 탑인지 보입니다.
좁고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입니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놓았는데 하부에서 상부로 가면서 점차 폭을 줄이는 민흘림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기둥에 민흘림을 준다는 것은 나무 기둥의 법을 돌에 옮긴 것입니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 줍니다.
국가유산청은 이것을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고 적습니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민흘림기법의 기둥 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입니다. 둘뿐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미륵사지에 있고, 둘을 나란히 보면 백제 석탑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갔는지가 두 점으로 그려집니다.
고려가 남긴 것, 1993년이 남긴 것
절터에 남은 두 번째 물건은 백제의 것이 아닙니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습니다.
그러니 지금 절터에는 세 시대가 서 있습니다. 7세기의 탑, 고려의 불상, 1993년의 보호각. 어느 것이 어느 시대인지 알고 보는 것이 이 자리를 제대로 보는 방법입니다.
이 자리는 1983년 3월 26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면적은 61,449㎡입니다. 2015년에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여덟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남쪽 중문 자리에서 북쪽을 향해 서 보세요. 탑–금당터–강당터가 한 줄에 놓이는 자리가 거기입니다. 옆에서 보면 그냥 넓은 마당인데, 축 위에 서면 절이 어떻게 생겼었는지가 한 번에 잡힙니다. 그 다음에 회랑 자리를 따라 걸으면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이라는 것도 발로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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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정림사라는 이름은 백제 때 이름인가요?
아닙니다.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의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 명문으로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렸음을 알 수 있을 뿐, 백제 때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왜 '평제탑'이라고 불렸나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탑은 백제가 세운 것이고, 지금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부릅니다.
백제 석탑이 몇 기나 남아 있나요?
두 기입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익산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절터에서 무엇을 볼 수 있나요?
백제 때 세운 오층석탑,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 발굴로 드러나 정비된 중문 앞 연못, 그리고 남북 일직선 축 위의 건물터들입니다.
석불좌상을 덮은 건물은 언제 지었나요?
1993년입니다. 고려시대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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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확인일:
공식 출처
- 사실 확인: 국가유산포털 — 사적 부여 정림사지 (1983년 3월 26일 지정, 면적 61,449㎡,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번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 자리; 강당터 출토 기와의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 명문으로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렸음을 확인; 중문·오층석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 축에 놓이고 복도가 감싸되 북쪽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 중문 앞 연못이 발굴로 드러나 정비; 석불좌상 보호 건물은 1993년 건립)
- 사실 확인: 국가유산포털 — 국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1962년 12월 20일 지정, 1기, 백제시대 후기 7세기, 관리 부여군; 좁고 낮은 1단 기단 위에 5층 탑신;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이라는 글귀를 남겨 한때 '평제탑'으로 잘못 불림; 민흘림기법의 기둥 표현과 얇고 넓은 지붕돌;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기만 남은 백제시대 석탑)
- 사실 확인: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 백제역사유적지구(1477). 475~660년의 고고 유적 여덟 곳으로 구성되며, 정림사가 사비 도읍의 구성요소로 명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