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1592년의 침략
1592년 4월 14일 오후 5시에 시작된 7년 전쟁. 왜 준비된 지휘관이 한 명뿐이었는지, 삼대첩이 무엇인지, 그리고 궁궐이 어떻게 불탔는지에 대해 사료가 두 가지로 갈리는 이유.
언어

서울의 궁궐을 돌다 보면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보게 됩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경복궁도, 창덕궁도, 창경궁도 그렇습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입니다. 7년입니다. 지금 서울에서 보는 궁궐의 모습이 왜 그런지를 결정한 전쟁이라, 궁궐을 보기 전에 알아 두면 안내판이 다르게 읽힙니다.
한눈에 보기
1592–1598, 2차에 걸친 침입
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이어진 일본과의 전쟁입니다.
1592년 4월 14일 오후 5시
고니시의 제1번대가 병선 700여 척으로 부산 앞바다에 도착해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했습니다.
준비된 사람은 한 명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전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다고 기록됩니다.
제해권
한산도·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해 적의 서해 진출을 차단했습니다.
전쟁 전의 조선은 어떤 상태였나
기습의 규모만으로는 초기의 붕괴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백과사전은 개전 전의 정치 상황을 먼저 적습니다.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와 훈구·사림 세력 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중앙 정계가 혼란했고,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방비 점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립을 경기·황해도에, 이일을 충청·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습니다.
그리고 한 문장이 남습니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전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순신이 왜 특별한 인물로 기록되는지가 이 한 줄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첫날, 그리고 파천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는 1592년 4월 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했습니다.
조정은 처음에는 도성을 지키려 했습니다. 충주 패보를 접하기 이전까지는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중신들의 결의는 변함이 없었고, 선조의 피난을 주장하는 조관들도 대의에 눌려 강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파천이 결정됩니다. 대간과 종실들은 사직을 버리지 말 것을 애원했고 유생들도 소를 올려 반대했으나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같은 날 대신들의 청으로 둘째 아들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백관에게 융복을 입도록 명한 것도 이날이었습니다.
궁궐은 어떻게 불탔나 — 사료가 갈립니다
궁궐 안내판이 대개 넘어가는 대목이고, 사실 여기가 흥미롭습니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왕이 서울을 떠나자 난민이 노비문서를 맡고 있던 장례원과 형조를 불질렀고, 이때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세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백과사전은 곧바로 "이와는 달리"라고 쓰고, 고니시가 이끄는 1번대를 따라온 종군 승려의 일지인 『서정일기』의 다른 기록을 제시합니다.
즉 세 궁궐이 임진왜란 중에 불탔다는 사실은 다툼이 없지만, 누가 불질렀는가에 대해서는 조선 측 기록과 일본 측 종군 기록이 다릅니다. 이것은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이고, 여기서 어느 한쪽을 답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궁궐에서 "임진왜란 때 소실"이라는 문장을 볼 때 그 뒤에 이런 층이 있다는 것만 알아 두면 충분합니다.
바다에서 전세가 갈립니다 — 그리고 삼대첩
육지에서 밀리는 동안 바다에서 다른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산대첩에서 조선 함대는 층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파괴하고 나포했고, 지휘하던 와키사카는 쾌속선으로 겨우 탈주했으며 적선 10여 척만이 간신히 도망쳤습니다.
이 3차 출동에서 적선 약 100여 척을 격파 또는 나포하여 개전 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고, 결정적으로 한산도·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삼대첩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싸움, 그리고 권율이 의승장 처영 등과 함께 거둔 대승입니다.
전쟁 후반에는 큰 굴곡이 있었습니다. 한산도를 통제영으로 삼아 남해안을 지켜오던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원균이 후임이 되었으며, 원균은 미숙한 전술로 패사하고 이억기·최호·배흥립 등도 전사하여 이순신이 쌓아놓은 한산도의 수비가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9월 16일 명량에서 대첩을 거두어 일본군의 서진을 봉쇄했습니다.
지금 무엇을 볼 수 있나
이 전쟁의 흔적은 '전적지'보다 궁궐에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창덕궁이 그 대표입니다. 전쟁으로 궁궐이 모두 불탄 뒤 가장 먼저 재건된 것이 창덕궁이었고, 그 결과 조선의 왕들이 오래 머문 곳은 정궁인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이 되었습니다. 지금 창덕궁이 '가장 한국적인 궁궐'로 소개되는 배경에 이 전쟁이 있습니다.
경복궁은 반대편의 증거입니다. 오래 비어 있다가 19세기에 다시 세워졌기 때문에, 지금 보는 것은 14세기의 계획 위에 세워진 19세기의 건물입니다.
각 궁궐의 재건 연대와 관람 정보는 아래 카드의 장소 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임진왜란과 이어지는 곳
자주 묻는 질문
임진왜란은 언제 일어났나요?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침입한 전쟁입니다. 고니시의 제1번대가 1592년 4월 14일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해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했습니다.
조선은 왜 초기에 그렇게 밀렸나요?
4대 사화와 훈구·사림 간 정쟁,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으로 정치의 정상적 운영이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방비 점검을 위해 신립과 이일을 급파했으나 이미 늦었고,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전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기록됩니다.
서울의 궁궐은 누가 불태웠나요?
결론이 갈립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왕이 서울을 떠나자 난민이 장례원과 형조를 불질렀고 이때 세 궁궐이 모두 불탔다고 적고 있고, 백과사전은 이와 다른 기록으로 일본군을 따라온 종군 승려의 일지 『서정일기』를 함께 제시합니다.
임진왜란 삼대첩은 무엇인가요?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싸움, 그리고 권율이 의승장 처영 등과 함께 거둔 대승입니다.
이 전쟁을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서울의 궁궐들이 가장 직접적입니다. 창덕궁은 전쟁 후 가장 먼저 재건된 궁궐이고, 경복궁은 오래 비어 있다가 19세기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주변 맛집
여행 가이드
관련 글
마지막 확인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