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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무덤에 잔디 대신 갈대를 심은 창업자

조선 제1대 왕, 재위 1392~1398년. 다른 왕릉의 봉분은 깎은 잔디인데 건원릉만 북쪽에서 가져온 갈대이고, 백과사전이 그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함경도에서 난 무장, 전주라는 본관, 그리고 왕조가 아니라 사람이 보이는 서울 근처 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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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옆마당에서 본 건원릉 정자각. 뒤편 숲이 덮인 언덕 위로 봉분이 솟아 있고 좌우에 작은 부속 건물이 서 있다

동구릉에는 아홉 언덕에 아홉 기의 능이 있고, 그중 여덟은 잔디를 곱게 깎아 두었습니다. 하나만 그렇지 않습니다. 태조의 봉분은 덥수룩하고, 그 이유가 기록에 적혀 있습니다.

건원릉의 사초는 북도의 청완을 심었는데, 일반적으로 산릉의 사초에 모화관의 잔디를 사용한 것과 비교하면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북쪽에서 난 사람의 무덤에 북쪽 갈대를 심었고, 그 사람은 남쪽으로 내려와 왕조를 세웠습니다. 잔디밭 하나에 이야기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한눈에 보기

  • 왕이기 전에 무장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활솜씨가 뛰어났고,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큰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 영흥에서 나고 본관은 전주

    동북면 끝의 화령부(영흥)에서 태어났고, 집안의 본관은 전주였습니다.

  • 재위 1392~1398년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한양으로 천도했으며, 왕자들의 계승 다툼에 실망해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 갈대를 심은 무덤

    건원릉의 봉분은 모화관 잔디가 아니라 북도의 청완으로 사초를 입혔습니다.

원나라에 벼슬하던 변방 집안

조선을 세운 사람은 고려 조정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변두리에서 나왔고, 집안은 네 대에 걸쳐 반대편에서 일했습니다.

선조 이안사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던 남경(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고,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와 손자 이춘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로서 원나라에 벼슬했습니다.

아버지 이자춘도 원나라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였습니다. 그는 1356년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해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으며,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사병 집단과 「제때 편을 고르는 습관」을 함께 물려받은 셈입니다. 1361년 10월에는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 박의를 잡아 죽였고, 같은 해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해 정월에 친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습니다.

기록은 그를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고 적습니다. 뒤의 조선 왕들은 대체로 먼저 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회군, 그리고 뒤따른 네 가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순간은 멈춘 행군입니다.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해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신흥 정치세력의 대표로서 기반을 닦아 공양왕을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 즉위했습니다.

그다음이 순서대로 둘입니다.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고, 한양으로 천도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결정이고 각각 따로 논쟁을 거쳤습니다. 국호가 정해진 과정왜 도읍을 옮겼는가는 각각 따로 다룹니다.

그리고 집안에서 어긋났습니다.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의 싸움에 실망하여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재위 6년이었습니다.

그는 1408년 5월 24일,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상태에서 창덕궁의 별전에서 승하했습니다. 조선을 세운 사람이 실제로 숨을 거둔 궁은 그가 지은 궁이 아닙니다.

무덤을 정한 방식 — 점을 친 것까지 포함해서

건원릉은 기록이 유난히 잘 남아 있고, 그 기록의 내용은 대개 논쟁입니다.

터를 양주의 검암으로 정하고 조묘도감제조 박자청이 공역을 시작했습니다. 지하 구조인 현궁을 석실로 만들자는 의견과 회격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대립하자, 7월 26일에 세자 이제에게 명하여 종묘에 나가 점을 쳐서 석실로 짓도록 결정했습니다.

성리학적 명분으로 왕조를 갈아 치운 나라가 창업자의 무덤 구조는 종묘에서 점을 쳐 정했습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사실이고, 그 둘째가 벌어진 자리가 종묘입니다.

9월 7일에 공역이 마무리되어 9월 9일에 국장이 이루어졌습니다. 1409년 윤4월에는 권근이 비문을 짓고 성석린이 글씨를 쓰고 정구가 전액을 써서 신도비를 세웠습니다.

뒤의 왕들이 계속 찾아왔습니다. 1690년 숙종은 비각을 세우지 않아 신도비의 글자가 문드러졌으니 비각을 세우라고 명해 1691년에 완공했습니다. 1764년 2월 정자각을 수리하게 되자 태조의 능이라 하여 영조가 특별히 행차해 알릉례를 행하고 하룻밤 묵으며 공역을 살폈습니다. 1784년 능상의 석물과 곡장이 무너지자 정조도 영조의 예를 본받아 직접 작헌례를 거행한 뒤 수리를 시작했습니다.

가서 무엇을 볼 것인가

능은 세 단으로 읽히고, 기록이 그 목록을 줍니다.

지하 구조는 석실이며 봉분에는 병풍석을 세우고 난간석을 둘렀습니다. 면석에는 12지신을 새겨 방위를 나타내고, 우석에는 영저와 영탁을 새긴 조선 초기의 특징이 보입니다.

능상은 계체석을 3단으로 구성했습니다. 상계에는 중앙에 혼유석을 두고 양쪽에 망주석을 배치했고, 중계에는 장명등을 중심에 놓고 문석인 한 쌍이 마주 보고 섰으며, 하계의 중앙에 정중석이 놓이고 양쪽에 무석인이 마주 보고 서 있습니다.

능상 아래에는 정전 3칸과 배위청 2칸으로 구성된 정자각이 있는데, 18세기의 익공 형식이 잘 남아 있어 2011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춘관통고』에 따르면 정자각에서 홍살문까지 거리는 약 97보이며 수라청과 수직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수직방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풀. 건원릉은 1408년에 건립되었고 이후로 여덟 기의 능이 더 조성되면서 동구릉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여덟을 먼저 걷고 나면, 아홉 번째는 더 이상 미묘하지 않습니다.

고를 수 있다면 늦가을에 가세요. 갈대 사초는 왕릉 사진으로는 잘 안 잡히는 유일한 요소인데, 마르고 색이 바래 깎아 놓은 이웃 여덟과 나란히 있을 때 가장 확실하게 보입니다.

태조와 이어지는 곳

자주 묻는 질문

태조의 봉분은 왜 동구릉의 다른 능과 다른가요?

사초를 북도의 청완, 즉 갈대로 심었기 때문입니다. 백과사전은 이것을 특징적인 모습으로 기록하며, 일반적으로 산릉의 사초에는 모화관의 잔디를 사용했다는 점과 비교합니다.

이성계는 어디 사람인가요?

동북면 끝의 화령부(영흥)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의 본관은 전주였고, 그래서 그가 자란 곳이 아닌데도 전주가 그의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조선 이전에 그의 집안은 무엇을 했나요?

원나라에 벼슬했습니다. 선조 이안사가 원의 지방관이 되었고 두 대가 더 천호로 이어졌습니다. 아버지 이자춘은 쌍성의 천호였다가 1356년 고려 편으로 돌아서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재위 기간은 얼마나 되나요?

1392년부터 1398년까지 6년입니다.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한양으로 천도했으며, 왕자들이 계승을 두고 다투자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어디에서 승하했나요?

1408년 5월 24일, 상왕으로 물러나 지내던 중에 창덕궁의 별전에서 승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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