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TRAVEL LIST
여행아티클전국

류성룡과 『징비록』: 안동 하회 충효당·병산서원

류성룡의 이순신 천거와 임진왜란기 국정 운영, 『징비록』, 안동 하회 충효당과 병산서원에 남은 흔적을 출처와 함께 정리했습니다.

2026년 9월 17일 수정11 분 읽기

언어

병산서원 만대루의 트인 기둥 사이. 건물 길이만큼 마루가 이어지고 그 너머로 숲이 덮인 산이 보인다

류성룡(1542~1607)은 임진왜란기의 조선 고위 관료이자 『징비록』을 남긴 인물입니다. 전쟁 전에는 권율과 이순신을 군사 요직에 천거했습니다.

이순신 천거는 중요한 업적이지만 그의 경력 전부는 아닙니다. 전시 군무를 총괄하고 훈련도감 설치를 추진했으며, 당파 갈등 속에서 두 차례 관직을 잃은 뒤 전쟁의 경험을 후대에 기록했습니다.

안동을 여행한다면 그와 이어지는 곳은 하회마을 충효당과 병산서원 두 곳입니다. 마지막 절에서 두 곳이 각각 무엇을 보여 주는지, 그리고 충효당이 왜 그가 직접 지은 집이 아닌지를 설명합니다.

류성룡 한눈에 보기

  • 학자이자 관료

    의성에서 태어난 풍산 류씨로 이황에게 배우고 1566년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 주요 지휘관 천거

    침공에 대비해 권율을 의주목사에, 이순신을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했습니다.

  • 전쟁기 국정 지휘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일했지만 1592년 면직됐다가 복귀했고 1598년에 다시 관직을 잃었습니다.

  • 『징비록』 저술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황의 제자에서 고위 관료로

류성룡의 본관은 풍산, 자는 이현, 호는 서애입니다. 의성에서 태어나 이황에게 배웠고 김성일과 함께 수학했습니다. 156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문관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습니다.

1590년 우의정에 올라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1591년에는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했습니다.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에 속해 강경파 북인의 이산해와 대립했습니다.

일본의 침공 가능성이 커지자 류성룡은 권율을 의주목사에, 당시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을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했습니다. 경상우병사 교체와 지역 방어 체계인 진관법의 복구도 요청했습니다. 이순신의 생애와 전투 기록은 별도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쟁 지휘와 면직, 복귀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침입하자 류성룡은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했습니다. 이어 영의정으로 선조를 호종했지만 평양에서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면직됐습니다.

곧 의주에서 평안도도체찰사로 복귀했습니다. 이듬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평양성 수복에 참여했고, 충청·경상·전라 3도 도체찰사로 파주까지 진격했습니다. 이후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 도체찰사를 겸했습니다.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패한 뒤에는 명군의 퇴각을 막으려 했고, 권율과 이빈에게 파주산성과 주요 지점을 지키게 했습니다. 조정이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훈련도감 설치를 요청했습니다.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로서 『기효신서』를 강해하고 군량과 군비 확충을 추진했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남긴 『징비록』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류성룡은 이를 해명하러 가지 않았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잃었습니다. 1600년 복관되고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됐지만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저술에는 『서애집』과 임진왜란을 기록하고 성찰한 『징비록』이 있습니다. 문인 정경세가 쓴 행장에는 류성룡이 평생 지은 글 가운데 많은 부분이 전란의 화재로 사라졌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국가유산청의 충효당 설명은 『징비록』과 『서애집』을 임진왜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합니다.

묘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습니다. 병산서원 등에 제향됐고 시호는 문충입니다.

안동에서 그의 흔적을 보는 두 곳

하회마을 충효당

충효당은 류성룡의 집으로 불리지만 현재 남은 건물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후손들이 지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 류원지가 짓고 증손자 류의하가 확장·수리했으며, 행랑채는 8대손 류상조가 지었습니다. 사랑채 대청의 「충효당」 현판은 허목이 쓴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충효당은 류성룡이 직접 지은 생전 거처라기보다 후손들이 이어 온 집안의 역사를 보여 주는 곳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에서 출발했습니다. 류성룡이 1572년 현재 자리로 옮겼고, 1614년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1629년에는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가 추가됐습니다.

1863년 임금에게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1868년 서원철폐령 뒤에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2019년에는 아홉 개 서원으로 구성된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에 포함됐습니다. 건축과 교육기관으로서의 역사는 병산서원 별도 안내에서 다룹니다.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은 서로 다른 의미로 살펴보세요. 충효당은 후손들이 이어 온 가문의 역사를 보여 주고, 병산서원은 류성룡의 교육·제향 및 서원 전통과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두 곳 모두 안동시 풍천면에 있지만 주소가 따로이니, 나서기 전에 아래 장소 카드에서 각각의 관람 시간을 확인하세요.

류성룡과 이어지는 곳

자주 묻는 질문

류성룡이 이순신을 임명했나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천거했다고 나옵니다. 당시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을 전라도좌수사에 추천한 것이므로 ‘천거’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류성룡과 유성룡은 같은 사람인가요?

같은 사람입니다. 자료에 따라 성을 ‘류’ 또는 ‘유’로 적으며, 이 글에서는 ‘류성룡’으로 통일했습니다.

전쟁 기간에 계속 영의정이었나요?

아닙니다. 전쟁의 주요 시기에 영의정으로 일했지만 1592년 평양에서 면직됐다가 복귀했고, 1598년에 다시 관직을 잃었습니다.

충효당을 류성룡이 직접 지었나요?

아닙니다. 현재의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가 짓고 증손자가 확장했으며, 행랑채는 8대손이 지었습니다.

『징비록』은 무엇인가요?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기록하고 성찰한 저술입니다. 『서애집』과 함께 전쟁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공유: X Facebook

주변 맛집

여행 가이드

마지막 확인일:

공식 출처 (3)
사진 출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