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
임진왜란 내내 영의정이었고, 일본이 상륙했을 때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이 함대를 지휘하고 있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하회에서 그의 집이라 부르는 충효당은 그가 지은 집이 아니며, 병산서원은 서원을 다 없애라는 명령에서 살아남은 47곳 중 하나입니다.
언어

1591년, 정읍현감 하나가 전라좌수사로 곧장 올라갔습니다. 열네 달 뒤 일본이 상륙했고, 그 사람의 이름이 이순신이었습니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류성룡은 형조정랑 권율과 정읍현감 이순신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했습니다.
그 장군에게는 따로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그를 그 자리에 앉힌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한눈에 보기
서애, 1542~1607
본관은 풍산, 호는 서애, 의성 출생입니다. 이황의 문인이고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습니다.
지휘관 둘을 천거했다
침공을 예상하고 권율을 의주목사로, 이순신을 전라도좌수사로 천거했습니다.
전쟁 중에 면직되고 다시 등용
평양에서 나라를 그르쳤다는 탄핵으로 면직되었다가, 의주에서 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징비록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로 평가됩니다.
퇴계의 제자가 전쟁을 지휘하게 되기까지
그의 훈련은 완전히 문관의 것이었습니다. 본관은 풍산, 자는 이현, 호는 서애, 의성 출생이고, 아버지 유중영은 황해도관찰사였습니다.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했고 서로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1564년 생원·진사가 되고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습니다. 이후 이십여 년의 관직이 이어지고, 그다음은 사다리가 짧습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해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591년에는 좌의정에 승진해 이조판서를 겸했습니다.
그해 건저문제로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와 대립했습니다. 이 갈래는 잡담이 아닙니다. 1598년에 그를 밀어내는 것이 바로 이 단층입니다.
천거 두 건과 함께, 그는 경상우병사 조대곤을 이일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했습니다. 전쟁이 그것을 정당화해 주기 전에 방어 구조를 다시 세우려 한 것입니다.
1592~1594: 잘리고, 다시 쓰이고, 군대를 만들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했습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했고,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습니다.
면직은 피난이 이어진 만큼만 이어졌습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했으며,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습니다. 이 해에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습니다.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대패해 서로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를 나누어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보다 오래 남은 대목입니다. 10월에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고,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가 되어 『기효신서』를 강해했습니다. 또한 호서의 사사위전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에 관둔전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했습니다.
상비 훈련군을, 토지를 돌려 재원을 만들어, 전쟁 중에, 유학자가 세웠습니다. 이것이 행정가로서의 업적이고 책보다 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끝났고, 그 뒤에 무엇을 썼는가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했습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문서상으로는 복권, 실제로는 은퇴였고, 『징비록』이 쓰이는 것이 그 은퇴 기간입니다.
여기에 하나 달아 둘 단서가 있습니다. 문인 정경세는 「서애행장」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고 적었는데, 이를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징비록』이 남은 데에는 나머지가 너무 많이 타 버렸다는 사정도 있습니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입니다.
안동의 두 곳, 그리고 각각이 실제로 무엇인가
그를 보러 가는 두 곳 다 정정이 필요합니다.
하회의 충효당은 그의 집입니다. 다만 그가 지은 집이 아닙니다. 유산 기록은 정확합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류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류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며, 긴 행랑채는 8대손 일우 류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입니다. 류성룡은 1607년에 죽었고 그때 손자는 아홉 살이었습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병산서원은 원래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습니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습니다. 건물 자체의 내력은 병산서원에서 다룹니다.
그리고 19세기 전체를 그와 이어 주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병산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입니다. 2019년 7월 6일에는 아홉 개 서원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서원」의 하나로 기준 iii 아래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만대루의 마루를 전망대가 아니라 강의실로 읽으세요. 병산의 그 길고 트인 누각은 유생들이 앉던 자리이고, 강 건너 절벽은 그들이 공부하며 바라보던 것입니다. 서원이 공부를 무엇이라 여겼는지가 가장 분명하게 남아 있는 자리입니다.
류성룡과 이어지는 곳
자주 묻는 질문
류성룡이 이순신을 임명한 것이 맞나요?
천거했습니다. 왜란을 예상하고, 당시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을 전라도좌수사에,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에 함께 천거했습니다.
류성룡인가요, 유성룡인가요?
둘 다 쓰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유성룡」으로 표제를 삼고, 충효당과 병산서원의 유산 기록은 「류성룡」으로 적습니다. 같은 사람이고 이 사이트는 「류성룡」을 씁니다.
전쟁 내내 그가 총책임자였나요?
아닙니다. 1592년 평양에서 나라를 그르쳤다는 탄핵으로 면직되었다가 의주에서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1598년에는 정응태 무고 사건을 두고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했고,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하회의 충효당을 그가 지었나요?
아닙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 류원지가 짓고 증손자 류의하가 확장했으며, 행랑채는 8대손이 지었습니다. 그의 집안 집이고, 시기는 그보다 뒤입니다.
『징비록』은 무엇인가요?
그가 남긴 임진왜란의 기록입니다. 유산 기록은 『징비록』과 『서애집』을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로 평가하며, 제자의 행장은 그의 다른 평생 시문 대부분이 전란의 화재로 없어졌다고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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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확인일:
공식 출처
- 사실 확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유성룡 (본관 풍산, 자 이현, 호 서애, 의성 출생;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유중영; 이황의 문인으로 김성일과 동문수학; 1566년 별시 문과 병과 급제; 1590년 우의정에 올라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짐; 1591년 좌의정 겸 이조판서,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에 속해 북인의 이산해와 대립; 왜란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에,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고 경상우병사 조대곤을 이일로 교체할 것과 진관법 복구를 청함; 1592년 4월 13일 침입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 이어 영의정으로 왕을 호종하다 평양에서 나라를 그르쳤다는 탄핵으로 면직; 의주에서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충청·경상·전라 3도 도체찰사로 파주까지 진격,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 도체찰사 겸임;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대패해 퇴각하는 것을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율과 이빈에게 파주산성을 지키게 함; 10월 서울 환도 후 훈련도감 설치를 요청, 1594년 제조가 되어 『기효신서』를 강해하고 호서의 사사위전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며 조령에 관둔전 설치를 요청; 1598년 정응태 무고 사건으로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작 삭탈, 1600년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하지 않고 은거;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짐;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 병산서원 등에 제향, 시호는 문충; 저서 『서애집』·『징비록』 등이 있고 문인 정경세의 「서애행장」은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다고 적음)
- 사실 확인: 국가유산포털 — 보물 안동 하회 충효당 (1964년 11월 14일 지정, 2동, 조선시대 중기; 조선 중기의 문신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집으로,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데 많은 공헌을 했고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 행랑채·사랑채·안채로 구성되며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류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류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했으며 행랑채는 8대손 일우 류상조(1763~1838)가 지음; 사랑채 대청에 걸린 「충효당」 현판은 명필가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함)
- 사실 확인: 국가유산포털 — 사적 안동 병산서원 (1978년 3월 31일 지정, 27,251㎡, 조선 선조 5년(1572);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 서남쪽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을 등지고 자리;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났고 임진왜란 때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한 군비확충에 공을 세움; 원래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김; 광해군 6년(1614) 존덕사를 세워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 철종 14년(1863)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됨;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 서원 중 하나; 2019년 7월 6일 「한국의 서원」으로 세계유산 등재, 9개 서원, 기준 ii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