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TRAVEL LIST
여행아티클전국

이순신

1576년 무과 급제부터 1598년 11월 19일 노량까지. 그가 왜 '준비되어 있던 유일한 지휘관'으로 기록되는지, 한산도에서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남긴 한 문장.

11 분 읽기

언어

각국 국기가 늘어선 진입로 끝의 전쟁기념관 정면

한국에서 가장 널리 존경받는 역사 인물을 한 명 꼽으라면 대개 이순신입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세종대왕 앞쪽에 서 있는 동상이 그입니다.

그는 조선시대 정읍현감, 진도군수,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입니다. 이 글은 영웅담이 아니라 기록에 남은 순서를 따라갑니다. 그 순서 자체가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한눈에 보기

  • 1576년 무과 급제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습니다.

  • 혼자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개전 직전 기록은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전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다고 적습니다.

  • 1593년,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

    남해안을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은 뒤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습니다.

  • 1598년 11월 19일 노량

    퇴각하려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공격에 나섰다가 적의 유탄에 맞았습니다.

늦게 시작한 무관

그는 일찍부터 예정된 명장이 아니었습니다.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습니다. 이후 여러 직을 거쳤고,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로 있을 때에는 국방 강화를 위해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의 침입을 받아,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된 일도 있었습니다.

이 대목을 굳이 적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경력에는 요청이 거부되고 책임을 진 기록이 여러 번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하옥도 그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 유일하게 준비된 지휘관

임진왜란의 기록에서 그의 이름은 예외로 등장합니다.

방비 점검을 위해 여러 지휘관이 파견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전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기록됩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했으며, 5월 2일 기함에 승선했습니다.

이 순서 — 정비, 분석, 집결, 연습, 그다음 출동 — 가 그의 방식이었습니다.

거북선, 그리고 한산도

5월 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싸움은 한산도입니다. 일본군은 견내량에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을 정박시키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했습니다.

그는 적이 있는 곳에서 싸우지 않고, 싸울 장소를 골랐습니다. 결과는 임진왜란 기록에 남은 대로입니다. 한산도·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했습니다. 그는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에 승계되었습니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하고 남해안 일대를 완전히 소탕한 뒤,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습니다.

하옥, 그리고 복귀

그의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생략되는 부분이 이 대목입니다.

한산도를 통제영으로 삼아 남해안을 지켜오던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그를 대신하여 원균이 임명되었습니다.

결과는 기록에 분명합니다. 원균은 미숙한 전술과 무지한 싸움으로 일본 수륙군의 전략에 말려 패사하고, 이억기·최호·배흥립 등도 전사하여 이순신이 쌓아놓은 한산도의 수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9월 16일 명량에서 대첩을 거두어 일본군의 서진을 봉쇄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마지막은 철수하는 적을 향한 싸움이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습니다. 물러가는 적선에 맹공을 가했고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선두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적의 유탄에 맞았습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한국에서 이 문장은 거의 모두가 압니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의, 이길 것이 확실한 싸움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이 이 문장의 무게를 만듭니다.

그를 볼 수 있는 곳

정직하게 적으면, 이순신과 직접 이어지는 장소는 대부분 서울 밖에 있습니다. 통영과 한산도, 여수, 진도 울돌목, 아산이 그렇습니다. 이 사이트는 아직 그 장소들의 기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그를 다루는 곳은 전쟁기념관입니다. 한국사 전체의 전쟁을 다루는 곳이라 임진왜란과 이순신도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광화문 광장의 동상은 기념물입니다. 그 앞을 지날 때,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면 동상이 조금 달라 보입니다.

이순신과 이어지는 곳

자주 묻는 질문

이순신은 어떤 관직을 지냈나요?

정읍현감, 진도군수,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훈련원봉사로 관직을 시작했습니다.

왜 그만 전쟁 준비가 되어 있었나요?

기록은 개전 직전 여러 지휘관이 방비를 점검했으나 이미 늦었고,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전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한산대첩이 왜 중요한가요?

이 해전과 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해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했습니다. 이순신은 이 공으로 정헌대부에 승계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왜 하옥되었나요?

무고로 하옥되었고 원균이 후임이 되었습니다. 원균이 패사하면서 한산도의 수비가 무너졌고,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기용되어 9월 16일 명량에서 대첩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언제 어떻게 죽었나요?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려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공격하던 중 선두에서 지휘하다 적의 유탄에 맞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공유: X Facebook

주변 맛집

여행 가이드

마지막 확인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