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 어디서 나왔는지도, 어느 나라가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높이 93.5cm의 금동상. 한쪽 다리를 얹고 두 손가락을 뺨에 대고 있는 7세기 전반의 상입니다. 출토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제작국은 백제와 신라로 의견이 갈립니다. 그리고 교토의 한 절에 있는 목조상이 너무 닮아서, 이 논쟁은 백 년째 두 나라를 오가고 있습니다.
언어

이름난 유물에는 대개 「어디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붙습니다. 이 상에는 없습니다.
출토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20년대 이후에 발견되어 오랫동안 덕수궁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이 공백은 각주가 아닙니다. 이 상을 둘러싼 가장 큰 질문이 아직 닫히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눈에 보기
높이 93.5cm, 금동
청동에 도금했습니다. 같은 유형의 삼국시대 상 가운데 큰 편입니다.
산 셋을 얹은 관
관의 삼면이 각각 둥근 산 모양을 이루어 삼산관반가사유상으로도 불립니다.
백제인가 신라인가
제작 국가에 대한 의견이 갈립니다. 백과사전은 그 불일치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적습니다.
7세기 전반
연대는 기록으로 확인된 해가 아니라 폭넓은 추정입니다.
바다를 건너는 논쟁
출토지가 없으니 제작국은 유물 자체와 그것을 닮은 것들로부터 따져야 합니다.
제작 국가에 대하여는 백제와 신라라는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이후 두 갈래의 근거가 제시됐습니다.
하나는 국내입니다. 1966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석조여래좌상의 하반신 부분이 발견되어 — 지금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있습니다 — 두 상의 형태와 옷주름 처리에서 유사성이 지적됐습니다. 봉화는 신라 땅입니다.
다른 하나는 국외입니다. 일본 교토 고류사의 목조반가사유상이 이 상과 매우 비슷하고, 고류사의 창시자 진하승이 신라와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거나 신라에서 전해진 상이 이 절에 모셔졌다는 일본의 기록은 이 상이 백제보다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 줍니다.
🔴 문장을 그대로 읽으십시오. 가능성을 높여 준다입니다. 판결이 아닙니다. 두 상의 닮음과 절의 창건 설화가 신라 쪽을 더 잘 받쳐 줄 뿐이고, 백과사전은 여전히 이 질문을 갈린 것으로 적습니다. 어느 나라가 만들었다고 단정해 말하는 사람은 기록보다 앞서 나간 것입니다.
이 자세가 하고 있는 일
한쪽 발목을 반대쪽 무릎에 얹고 두 손가락을 뺨에 댄 자세입니다. 이 자세에는 이름과 주인공이 있습니다. 생각에 잠긴 미륵보살입니다.
유형이 어디서 왔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은 대체로 중국 동위부터 북제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의 형식과 양식을 반영합니다. 이 자세는 한국이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가입니다. 이 상은 북제의 상들보다 더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다듬어져 있고, 백과사전이 읽어 낸 솜씨는 구체적입니다. 단순하고 균형 잡힌 신체 표현,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과 코와 입입니다.
국내의 양식적 친척도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평천리 출토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반가사유상입니다. 이 상은 수입된 계보의 끝이 아니라 한국 안의 계보 속에 있습니다.
여기서 「국보 제83호」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
이 상은 거의 어디서나 국보 제83호로 불립니다. 그 번호는 공식 목록에서 물러났습니다.
국가유산청 목록에서 이름에 「반가사유상」이 들어가는 국보를 찾으면 정확히 셋이 나옵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4)입니다. 이름이 담고 있는 것은 번호가 아니라 연도와 일련번호입니다.
이 상이 1962-2 입니다. 흔히 78호라 불리는 상이 1962-1 이고요. 둘 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며, 흔히 118호라 불리는 셋째는 삼성문화재단이 관리합니다.
🔵 옛 번호가 역사로서 틀린 것은 아니고, 예전 책에서 유물을 찾을 때는 여전히 가장 빠른 열쇠입니다. 다만 지금 목록에 적힌 것이 아닐 뿐입니다. 공식 데이터베이스에서 번호로 검색했는데 아무것도 안 나온다면 이 때문입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관을 먼저 보십시오. 둥근 산 모양 셋이고, 다른 이름은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다음 손을 보십시오. 손가락이 뺨을 누르지 않고 살짝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옆으로 자리를 옮기십시오. 옷주름은 새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입체적으로 처리됐다고 적혀 있는데, 옆에서 보면 그 말에 동의하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볼 곳
이 상을 두고 다투는 두 나라는 삼국시대 개관에, 그 뒤 한 세기 동안 불교가 무엇이 되었는지는 통일신라의 불교에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어느 나라가 만들었나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백제와 신라로 의견이 갈립니다. 1966년 봉화에서 발견된 석조여래좌상과의 유사성, 그리고 교토 고류사 목조반가사유상과의 닮음이 신라 쪽 가능성을 높이는 근거로 제시되지만, 질문 자체는 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출토됐나요?
출토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20년대 이후에 발견되어 오랫동안 덕수궁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왜 삼산관반가사유상이라고도 하나요?
관의 삼면이 각각 둥근 산 모양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아직 국보 제83호인가요?
국보인 것은 그대로이지만 공식 목록은 더 이상 그 번호를 쓰지 않습니다. 목록상의 이름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곧 연도와 일련번호입니다.
어디서 볼 수 있나요?
목록은 1962-1 상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는 것으로 기록합니다. 이 글은 특정한 날에 무엇이 전시되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유물 하나를 보러 가신다면 박물관의 전시 안내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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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확인일:
공식 출처
- 사실 확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1962년 국보 지정, 같은 해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더불어 크기와 조각 수법에서 삼국시대 금동 불상을 대표하는 걸작, 출토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20년대 이후에 발견되어 오랫동안 덕수궁미술관에 소장, 머리에는 삼면이 각각 둥근 산 모양을 이루는 관을 쓰고 있어 삼산관반가사유상으로도 불림, 보관 형태와 군의 주름 처리 방식에서 평천리 출토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및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반가사유상과 양식적 계보를 같이함, 단순하고 균형 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코·입이 완벽한 주조 기술을 보여 줌,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은 대체로 중국 동위부터 북제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의 형식과 양식을 반영하나 이 상은 북제의 상들보다 더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다듬어짐, 제작 국가에 대하여는 백제와 신라라는 두 가지 의견이 있음, 1966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발견된 석조여래좌상의 하반신 부분(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이 알려진 이후 두 상의 형태와 옷주름 처리에서 유사성이 지적됨, 일본 교토 고류사의 목조반가사유상이 이 상과 매우 비슷하며 고류사의 창시자 진하승이 신라와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거나 신라에서 전해진 상이 이 절에 모셔졌다는 일본의 기록은 이 상이 백제보다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 줌, 제작 연대는 대체로 7세기 전반으로 추정, 높이 93.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사실 확인: 국가유산청 공개 목록 — 국보 가운데 이름에 「반가사유상」이 들어가는 기록은 정확히 셋으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과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4)은 삼성문화재단이 관리한다. 목록의 이름은 지정 번호가 아니라 연도와 일련번호를 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