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1950–1953)
1950년 6월 25일 새벽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전선이 네 번 뒤집힌 전쟁의 실제 순서, 인천상륙작전이 왜 반대에 부딪혔는지, 그리고 서울과 부산에서 이 전쟁을 볼 수 있는 곳.
언어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입니다.
3년 남짓한 전쟁이지만, 이 전쟁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기간이 아니라 전선이 여러 번 뒤집혔다는 사실입니다. 서울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 순서를 알고 보면 전쟁기념관의 전시가 훨씬 잘 읽힙니다.
선이 왜 그어져 있었는지는 분단의 과정에서 다룹니다.
한눈에 보기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했습니다.
16개국
유엔 결의로 미국에 최고지휘권이 위임되고, 육·해·공군을 파견한 16개국 군대가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9월 15일 인천
미 제10군단과 5,000명의 한국해병대가 새벽에 월미도에 기습상륙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습니다.
첫 사흘 — 서울이 이틀 만에 넘어갑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했습니다.
속도가 이 전쟁의 첫 국면을 설명합니다. 정치가 불안정한 가운데 무방비상태에 있던 한국에 대한 북한의 기습공격은 6월 27일에는 이미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남진을 계속했습니다.
국제 대응도 같은 속도로 움직였습니다. 미국은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을 '침략행위'라고 선언하고 즉시 전투 중지와 38선으로의 철군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7월 7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에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맥아더가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로써 육군·해군·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국의 군대가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즉시 이동했으나 전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여 항쟁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반대에 부딪혔던 계획입니다
이 작전이 유명한 이유는 성공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거부당한 계획이었습니다.
계획이 구상되기 시작한 것은 전쟁 발발 직후인 7월 15일입니다.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에 상신했지만, 군사력의 분산과, 인천이 지형상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가장 부적합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오히려 부산 교두보를 증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맥아더의 반론은 세 가지였습니다. 인천의 간만의 차가 9m에 불과하지만 6시간은 상륙작전에 사용 가능하다는 것, 북한군이 부산 점령을 위해 병력을 그쪽에 집중하고 있어 인천 방어가 소홀하다는 것, 그리고 수도 서울을 빨리 탈환하는 것이 군인과 민간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9월 8일에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9월 15일 새벽,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가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했고 다음날 인천을 함락시켰습니다. 미 제7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단절되었습니다.
9월 26일 유엔군이 서울에 진입했고, 완전히 회복한 뒤인 9월 29일에 서울수복 기념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뒤집힙니다
전세가 역전된 뒤의 국면이 이 전쟁을 3년짜리로 만들었습니다.
유엔의 결의에 따른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역전되던 전황은,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머물렀습니다.
38선 이북 작전을 둘러싼 판단도 남아 있습니다. 1950년 7월 7일 유엔 안보리 결의에서 유엔군의 참전 목적은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보장을 회복'한다는 것이었고, 이것이 한국이 내세운 통일 목표와 일치하는지는 논란거리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9월 27일에 38선 이북에서의 군사작전을 허가하면서, 강대국들 간의 전면전쟁을 막기 위해 지상군 및 공군이 소련이나 중국의 국경을 넘는 것은 엄히 금지했습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습니다. 백과사전은 결과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하여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 전쟁을 볼 수 있는 곳
전쟁을 다루는 장소는 성격이 서로 다릅니다.
서울의 전쟁기념관은 전쟁의 경과와 참전국을 정리해서 보여 주는 곳입니다. 진입로에 각국 국기가 늘어서 있는 이유가 16개국 파병이라는 사실과 이어집니다.
부산은 다른 각도입니다. 낙동강 방어선의 거점이 부산이었기 때문에, 부산에는 전쟁 시기의 흔적이 도시 안에 남아 있습니다. 임시수도기념관은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 왔던 시기를 다루고, 유엔기념공원은 참전국 전사자들이 안장된 묘역입니다.
세 곳을 함께 보면, 이 전쟁이 한국만의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설명이 아니라 장소로 전달됩니다.
한국전쟁을 볼 수 있는 곳
자주 묻는 질문
한국전쟁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났나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전쟁이 중지되었습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며, 그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몇 개국이 참전했나요?
육군·해군·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국의 군대가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1950년 7월 7일 유엔 안보리 결의로 미국에 최고지휘권이 위임되었습니다.
서울은 언제 점령되고 언제 되찾았나요?
1950년 6월 27일에 점령되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9월 26일에 유엔군이 진입해 9월 29일에 서울수복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왜 특별한가요?
처음에는 군사력 분산과 인천이 상륙에 부적합한 지형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 계획이었습니다. 맥아더가 간만의 차 속에서 6시간은 사용 가능하다는 점 등을 들어 주장을 굽히지 않아 9월 8일 대통령 허가를 받았고, 9월 15일 새벽에 실행되었습니다.
왜 전쟁이 3년이나 이어졌나요?
유엔의 개입으로 역전되던 전황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교착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주변 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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